80년대 중반 전두환 정권 시절에 많은 수의 운동권 학생들이 수배를 받고 은신생활을 했었지요. 그 당시 가끔 신문 사회면 한 구석을 조그마하게 장식하던 기사들이 있었습니다. 수배된 운동권 학생이라고 사칭하여 여자를 유혹하고 돈을 뜯어낸 사기범의 구속기사였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었던지 그런 기사는 잊을만 하면 나타나곤 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기수법에 약한 것이 여자만이 아니었는지 어떤 기사에서는 피해자가 교회 전도사인가 목사인가였던 것이 기억나는군요.
그러다가 1987년 6월이 왔고 그 이후로 언론에 대한 통제가 느슨해지면서 티비에서 그 이전에는 감히 다루지 못한 주제나 소재들을 다루기 시작했지요. 그 때 수배된 운동권 학생을 사칭한 사람을 소재로 하는 단막극이 방영된 적이 있지요. 아마 티비문학관이거나 베스트셀러극장이 아니었나 생각되지만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제목은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아무개동 몇통 몇반 사람들'이라는 형식의 제목으로 평범함 주소이지만 무언가 달동내 냄새를 물씬 풍기는 주소였지요. 전유성씨가 조연을 맡았던 것으로 기억을 하는데 다른 출연진들의 이름에 대해서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군요.
이야기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서울 어느 달동네에 사는 개장수가 주인공입니다. 달동네 한 구석에 있는 공터에서 개를 길러 보신탕집에 파는 것이 직업인 이 사람은 개장사에서 돈을 많이 벌었는지 집에도 방을 늘려짓고 세를 주어 그래도 그 달동네에서는 유지급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세들어 사는 사람들은 주로 술집에 나가는 젊은 여자들로 비록 무서운 마누라 때문에 그림의 떡이지만 매일 젊은 여자들을 보고 그들의 관심을 받는 것이 싫지만은 않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집에 한 젊은이가 세를 들어오면서 이 사람의 평범한 삶에 파장을 일으키기 시작합니다. 20대 초반에 약간 귀티가 나는 이 청년은 직업이 없는지 일 나가는 적도 없고 매일 자기 방에서 나오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가끔 정체를 알 수 없는 음률이 방에서 흘러나옵니다. 한 아가씨가 궁금증도 해소하고 작업도 걸어볼 겸 무슨 음악인지 질문을 하자, 약간 계면쩍은 표정으로 "이건 차이코프스키예요"라고 하면서 뭔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설명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 청년은 그 집에 세들어 사는 젊은 여자들의 관심의 촛점이 됩니다. 아가씨들은 어떻게 해서든 그 청년의 관심을 끌어볼려고 노력을 하게되고 그결과 개장수에 대해 원래 집주인에 대한 예의 이상이 아니었던 관심표명조차도 소홀히 하게 됩니다. 그것만 해도 개장수에게는 유쾌한 일이 아니며 은근히 질투심을 발동시키는 일입니다. 그런데 결혼한 지 오래되어 남편보기를 소 닭 보듯이 하며 평소에 화장을 하는 적이 없는 마누라까지 갑자기 화장을 하기 시작합니다. 새삼스럽게 남편을 위해 화장을 할 이유는 없고 마누라까지도 그 청년의 관심을 끌어보고 싶어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그 청년은 개장수의 적이 됩니다.
한 번 적으로 삼고 보니 청년의 행적에서 이상한 것들이 눈에 띄기 시작합니다. 전입신고를 해야하니 주민등록증을 보자고 해도 이런 저런 석연치 않은 핑계를 대고 미루기만 합니다. 그리고 가끔 가다 분위기가 심각한 중년남자들이 찾아와서 방안에서 한 동안 수근거리다가 돌아갑니다.그래서 하루는 중년남자들이 찾아온 그 방 앞에 가서 무슨 말을 하는지 엿들으려다가 들켜서 방안으로 끌려들어오게 됩니다.
영문도 모르고 끌려와 겁에 질려있는 개장수에게 수상한 중년의 남자가 말을 했습니다.
"이 청년이 누군지 아십니까?"
"이 청년은 재야의 지도자이신 김대삼 선생님께서 특별히 아끼는 청년으로,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독재정권에 의해 수배되어 지금 은신중인 사람입니다."
"이 청년을 잘 도와 주신다면 김대삼 선생님이 이 은혜를 결코 잊지 않을 것이며, 우리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훌륭한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심각한 분위기에 주눅이 들어 얼떨결에 "예! 예!" 대답은 했지만, 개장수는 아직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 날 날이 밝자 마자, 친구이며 동네에서 아는 것 많고 똑똑한 편으로 치는 복덕장 주인 전유성을 찾아가 물어봅니다.
"너 혹시 민주화운동이 무엇인지 아니?"
엉뚱한 사람으로 부터 갑자기 엉뚱한 질문을 받는 전유성은 당황을 해서 엉뚱한 대답을 해버립니다.
"그거 그, 옛날에 만주벌판에서 말달리고 독립운동 하는 거랑 거의 비슷한 것인데..."
그러다가 스스로 자기 말에 취해버려 전유성은 민주화운동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일제의 잔학함과 독립운동에 대해 열변을 쏟아놓게 됩니다.
그러나 개장수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민주화운동이 독립운동이랑 거의 비슷한 것이라면 자신도 당연히 도와야 하는 것이지요. 그 때부터 개장수는 그 청년을 극진히 돌보기 시작합니다. 먹는 것도 맛있는 것으로 챙겨주고, 개를 잡으면 좋은 고기는 따로 떼어 그 청년이 먹을 보신탕을 따로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지나가는 말로라도 그 청년에 대해 흉이라도 보면 정색을 하고 달려들어 변호를 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집에 돌아와보니 경찰이 자기집에 몰려와서 그 청년을 잡아가고 있었습니다. 그 청년을 구하자는 마음에 앞뒤 가리지 않고 경찰에게 덥벼든 개장수는 경찰에게 두들겨 맞고 자신도 경찰에 잡혀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자신도 이제 민주화운동 하다가 경찰에 잡혀왔으니 왜경에게 잡혀간 독립지사처럼 혹독한 고초를 겪을거라고 생각하며 겁에 질려있는 개장수에게 담당형사는 기가 막히지도 않는다는 듯이 실실 웃으며 훈방을 시켜 주었습니다. 그 청년은 대학생도 운동권도 아니고 똑같은 수법으로 도피중인 운동권이라고 사칭하여 여러 번 사기를 친 전력이 있어서 수배된 사람이라는 것도 친절히 알려주면서요.
그런데 그 다음 날 개장수는 정성스레 준비한 보신탕을 싸가지고 그 청년의 면회를 갑니다. 그리고 속으로 스스로에게 말합니다.
"네가 민주화운동을 하는 놈이 아니라 사기꾼이라도 상관없다. 그거랑 상관 없이 나는 너를 민주화운동 하는 놈과 똑같이 대접할 거니까. 대신 너는 내 보신탕 받아먹고 꼭 민주화운동 하는 놈이 되어야 한다!"
아마 그 청년은 1987년의 미네르바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개장수는 그 당시의 비합리적인 대중이겠지요. 과연 그 청년은 그 이후에 보신탕값을 했을까요? 그리고 그 청년이 아닌 진짜 운동권은 보신탕값을 했을까요?
추신: 근데 그 당시 운동권 중에는 보신탕을 얻어먹은 적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더군요. 이재오씨는 민자당에 합류하면서 "내가 그토록 민중을 위해 정치한다고 했지만 민중들은 나에게 표를 안 찍어주고 우리를 외면했다."고 말했다더군요. 어디선가 배달사고가 난 모양입니다. 그런데 배달사고가 났어도 보신탕값은 물어주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사족: 자고로 여자 등처먹고 사는 데는 독립운동만한 것이 없는 법인데, 개장수 등처먹는 데도 쓸모가 있는 모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