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03월 09일
레고 집단수용소를 만든 문제아 즈비그녜프 리베라

아직 레고 블록으로 만든 집단 수용소를 보지 못한 분들은 일단 사진 한장 보시고 나머지 사진은 그 밑에 링크를 참조하십시요.

http://puppetmstr.egloos.com/1865921
위의 포스팅에서 점선 위 부분의 레고 집단 수용소를 만든 문제아는 폴란드 예술가인 즈비그녜프 리베라(Zbigniew Libera)입니다. 1959년생인 리베라는 냉전기 공산주의치하에서 성장기를 보냈고 청년기인 1980년대에 지하발행물 간행에 참여하여 정치적 풍자만화를 그린 것이 문제가 되어 1982-1983년에 옥고를 치르기도 합니다.
리베라는 1996년 레고 폴란드 지사가 예술가들을 지원하기 위해 제공한 레고 블록들과 레고 악세사리들을 이용하여 이차대전중 나치 독일이 운영하였던 강제수용소의 여러 모습들을 재현해냅니다.
그의 작품에는 강제수용소의 막사, 감시탑, 철조망, 시체 화장장, '카나다'라고 불린 수용자에게서 압수한 물품을 보관하는 창고, 교수형 당하는 수용자, 수용자를 구타하는 간수, 수용자에게 생체실험하는 장면등, 나치 강제수용소의 여러 모습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한 리베라는 완성된 레고 집단 수용소의 사진을 찍어, 그 사진들을 이용하여 레고사의 실제 상품들과 흡사한 포장상자들을 만들어내어, 마치 레고 집단수용소 키트가 시중에서 쉽게 구매할 수 있는 상품인 것 같은 이미지를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상자의 커다란 레고 로고가 있는 부분에는 'This work of Zbigniew Libera has been sponsored by LEGO SYSTEM'이라는 글귀가 인쇄되어 있습니다.
그의 작품은 1997년 덴마크 코펜하겐의 파우스코우 화랑(Galleri Faurschou)에서 전시되었고, 폴란드, 독일, 브라질 등에서 전시되었으며, 2002년에는 뉴욕시 유태인 박물관(The Jewish Museum in New York City)의 기획 전시회인 'Mirroring Evil: Nazi Imagery/Recent Art'의 일부로 전시됩니다.
그의 작품은 홀로코스트를 어린이 장난 같은 하찮은 것으로 폄하하는 것이 아니냐며 처음부터 큰 논란을 불러있으켰으며, 그의 작품을 실제 레고에서 판매하는 상품으로 착각한 일부 유태인 단체들이 레고에 대한 불매운동을 하려고 하기도 했습니다. 처음 레고 블록을 기증할 때 리베라의 기획의도를 알지 못했던 레고사는 부랴부랴 진화 작업에 나섰으며 문제의 레고 집단수용소 작품의 전시 자체를 중단시키고자 했습니다만, 오히려 예술활동에 대한 사기업의 검열이라는 비판의 역풍을 맞고는 포기합니다.
2002년 뉴욕 유태인 박물관 전시 때는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이 모여 자신들 팔목에 새겨진 죄수번호 문신을 내보이며 항의시위를 하기도 했습니다.
즈비그녜프 리베라는 1997년 베네치아 비엔날레에 초대되었는데 당시 폴란드관의 조직자는 문제의 작품인 레고 집단수용소는 받아들일 수 없다며, 그것을 제외한 리베라의 다른 작품만을 제출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리베라는 오랜 실랑이 끝에 결국 베네치아 비엔날레 참여 자체를 포기하였습니다.
당시 폴란드관의 조직자의 입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사랑받는 장난감으로 홀로코스트를 다룬다는 것은 도가 넘는 짓이며 아마 반유태주의적이기까지 할 것이다."
"...taking on the Holocaust with one of the world's most beloved playthings is out of line and perhaps even anti- Semitic." (L.A. Tmes, 5.19.1997)
그런데 마쉬멜로우도 세상을 멸망시킬 수는 있는데 레고라고 하지 못할 이유가 있을까요?

"I tried to think of the most harmless thing,
something I loved from my childhood,
something that could never, ever possibly destroy us....
Mr. Stay Puft!"
이런 비판들에 대해 즈비그뉴 리베라는 자신이 반유태주의자라는 것을 부정하며 자신의 작품은 공산주의가 몰락한 동유럽사회에 자유시장이 도입되면서 생기는 아동교육, 사회적 규범, 문화적 불협화음 문제에 대한 도발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Libera, 38, backed by his newfound patrons at the fashionable Galleri Faurschou here in the Danish capital, has stood his ground. The Lego collection, he said, is neither anti- Semitic nor irreverent, but a provocation about child rearing, social norms and the cultural cacophony that the free market has brought to formerly Communist Eastern Europe. (L.A. Tmes, 5.19.1997)
그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리베라는 어떤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싶었던 걸까요?
우선 고려해야할 것은 그의 레고 집단수용소는 'Correcting Devices' 시리즈에 포함되는 그의 작품들 중의 하나라는 것입니다. 이 시리즈의 작품들은 낯익은 어린이들의 장난감을 이용, 변형하여 보여주면서, 사회가 어린이들을 어떻게 사회화하고 있으며 그 사회화가 지향하거나 은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기획들이라는 것입니다.
아래에 'Correcting Devices' 시리즈의 작품들 몇 개를 소개합니다.
남자 어린이용 장난감 보디빌딩 기구인 Body Master (1994-97)


낯익은 바비 인형의 패러디인 'Ken's Aunt' (1994)

여자 어린이들에게 앞으로 필요할 체모제거를 가르치는 면도 훈련용 아기인형. (1995)

여자 어린이용 장난감 분만대. (1996)


위의 작품들은 어린이들의 사회화 과정에서 제시되는 성적 역할과 이상형에 대한 문제삼기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의 레고 집단수용소도 역시 어린이들의 사회화과정에 대한 비판일 것입니다.
그런데 리베라가 문제 삼는 사회화 과정이 레고를 가지고 노는 행위인지 아니면 다른 것인지에 따라 다른 해석이 가능해집니다.
리베라를 옹호하는 비평가의 일부는 레고를 통해 권장되는 창조, 건설행위가 나중에 집단수용소를 건설하는데도 사용될 수 있는 것이며, 어린이의 놀이는 도덕적으로 순진한 행동이 아니며, 집단수용소를 만드는데도 사용될 수 있는 도적적으로 중립적인 행동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리베라의 작품을 이해합니다.
위키페디아의 즈비그녜프 리베라 항목에 있는 다음 구절이 그런 해석의 한 예일 것입니다.
"...the LEGO sets mirror the evil-minded ingenuity required to construct the concentration camps as instruments of terror." (http://en.wikipedia.org/wiki/Zbigniew_Libera)
그리고 Stephen C. Feinstein은 리베라가 소재로 사용한 레고가 무엇이든지 만들 수 있는 중립적인 소재인 점에 주목하면서 홀로코스트와 같은 극악한 행위의 요소들은 문명 그 자체에 이미 내재되어 있으며 단지 그것들을 어떻게 조립하느냐의 문제만이 있을 뿐이라는 것을 지적하는 것으로 리베라의 작품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The elements for such atrocity, as one reads Libera's pop-art, exists within civilization. All that is needed is the right person to "assemble" the pieces correctly. (http://www.othervoices.org/2.1/feinstein/auschwitz.html#N4)
리베라의 문제의 작품을 포함한 전시회 'Mirroring Evil: Nazi Imagery/Recent Art'를 기획한 뉴욕시 유태인 박물관의 큐레이터 Norman L. Kleeblatt도 역시 같은 입장에서 리베라를 옹호합니다.
People see that ''we can take the same building blocks that we can use to make houses, resorts and shopping centers and construct extermination camps with them,'' he continued. It raises the issue, he observed, ''of how the Nazis perverted the most human instincts -- for shelter, family and beauty.'' (New York Times, 2.6.2002)
위의 해석들은 레고 자체는 도적적으로 중립인 소재라는 입장을 취하지만, 이런 해석을 조금 더 발전 시킬 수 있습니다.
리베라는 레고로 집단수용소를 만들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상품으로 보이게 포장까지 했습니다. 그것은 레고로 상징되는 상업화되고 정형화된 세계가 한 편으로는 무엇이든 만들 수 있는 자유를 제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상자의 사진이 제안하듯이 실은 일정한 것을 만들도록 유도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지적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집단수용소를 만들도록 조건지워질 때도, 자신은 자유롭게 그것을 만들고 있다는 착각을 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지적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의 작품은 레고가 단순히 도덕적으로 중립적인 것이 아니라, 도덕적 무장해제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조금은 더 불온한 질문을 던지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문제제기가 레고로 상징되는 상업화되고 정형화된 세계에만 그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는 홀로코스트 교육이라는 또 다른 사회화 과정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하는 것 같습니다.
리베라는 자신이 어릴 때 겪은 홀로코스트 교육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9살 때 학교에서 단체로 아우슈비츠 견학을 갔으며, 거기서 그 모든 사진들을 보아야만 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어쨓든 우리 역사 때문에 홀로코스트와 여기서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 이야기할 것을 사람들은 폴란드인들에게 기대한다. 그래서 내가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어떤 사람들이 기대하던 식은 아닐지라도."
"I remember when I was 9 years old and my class went on the obligatory trip to Auschwitz and we had to look at all those photographs," he said. "Somehow, because of our history, Poles are expected to speak about the Holocaust and what happened here. So I am speaking about it, but maybe not in the way some people would expect." (L.A. Tmes, 5.19.1997)
1997년 브뤼셀에서 열린 'Art After Auschwitz Conference'에서 리베라는 그의 작품이 홀로코스트의 희생자들을 조롱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질문에 대해,
"나는 폴란드 사람이다, 그래서 독에 물들었다."라고 쏘아 붙였습니다.
Then the issue of propriety of the subject, the sanctification of the victims was raised: was not the use of pop art as a means of depiction a mockery? Libera, when questioned about his work, said: "I am from Poland; I've been poisoned." (http://www.othervoices.org/2.1/feinstein/auschwitz.html#N4)
그렇다면 리베라의 레고로 만든 집단 수용소는 어린 나이에 끔찍한 이미지와 함께 제공된 홀로코스트 교육으로 받은 트라우마를 치유하기 위한 과정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최소한 그의 작품을 본 사람 중에 한 명은 그런 반응을 표현하더군요. 리베라의 작품과 그에 관한 기사들을 소개한 한 웹싸이트에 한 무명의 눈팅객은 다음과 같은 코멘트를 남겼습니다.
"[그의 작품들에서] 강력한 해방감과 소름끼침을 동시에 느꼈다."
...I find them intensely liberating and chilling at the same time. (http://users.erols.com/kennrice/lego-kz.htm)
아우슈비츠 견학에서 돌아온 리베라 어린이는 자기방에 쳐박혀서 방금 본 집단 수용소의 참혹함을 레고블록으로 만들었다 부쉈다 하면서 그 트라우마를 소화하고 극복하려고 하는 상황을 상정해 볼 수 있겠지요.
그래서 예술비평가 Ernst van Alphen은 장난감으로 홀로코스트를 재구성하는 것은 홀로코스트 교육의 위압성으로 부터 벋어나 그 의미를 익숙한 것으로 재구성하려는 시도로 파악합니다.
Art historical criticism, like that proposed by Ernst van Alphen, has argued that these toys seek to represent and refigure the Holocaust in a more familiar register that recovers its meaning from overbearing Holocaust education programs. (http://en.wikipedia.org/wiki/Zbigniew_Libera)
리베라의 레고 집단수용소를 홀로코스트 교육에 따른 트라우마의 치유과정으로 본다면, 그것은 리베라의 다른 작품들의 시리즈인 'Positives'(2002-2003)와 긴밀히 연결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유명한 역사적 보도사진이 보여주는 상황과 유사한 상황을 배우들을 써서 연출하되, 그것이 원래 사진과는 정반대의 의미를 가지도록 한 사진들을 찍었습니다. 그는 사진의 원판 필름이 네가티브인 것에 착안하여 오리지날인 역사적 사건에 대해 완전히 전도된 의미를 가지는 카피인 그의 작품들을 'Positives'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아래에 있는 것이 그의 'Positives' 시리즈의 작품들과 그 오리지날 네가티브가 되는 보도사진들입니다.
Residents (2002)


Nepal (2003)


Miracle (2003)


Che, Next Picture (2003)


진짜 오리지날 네가티브는 밑의 사진입니다.

Cyclists


이 시리즈의 그의 작품들은 모두 트라우마적 사건들로부터 트라우마를 제거하고 있습니다.
이 트라우마가 지워진 복제는 두 가지로 이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로, 과거의 사건에 대한 현재의 의식이 저 사진들처럼 트라우마가 제거된 가짜라는 것을 폭로함으로해서 그 트라우마를 다시 직면하게 하는 효과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아직 극복되지 않은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한 시도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읽을 경우 리베라가 레고 집단수용소에서도 같은 것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원래 사건을 뒤집어 트라우마를 해결하려는 시도는 리베라만 한 것은 아니지요. 커트 보네거트의 소설 '제5 도살장'에서도 같은 시도를 하지요. 소설의 주인공인 빌리 필그림은, 이차대전에 미군으로 참전했다가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혀 드레스덴에 수용되어있던 중 그곳에서 드레스덴 대공습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많은 세월이 흐른 후 그는 자신의 꿈속에서 시간을 거슬러 꺼꾸로 진행되는 공습을 상상하지요. 그의 꿈속에서 도시에 번진 불은 점점 작아져 폭탄속으로 빨려들어가고, 불길을 다 흡수한 폭탄은 하늘로 치솟아 올라가 폭격기의 폭탄창으로 들어가고, 폭격기는 꺼꾸로 날라가 기지에 착륙하고, 착륙한 폭격기에서는 폭탄을 꺼내 공장으로 보내고, 공장에서는 많는 노동자들이 열심히 일해 폭탄을 분해하고, 분해된 폭탄의 부품과 재료들은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고, 세상은 다시 평화롭게 되지요.
리베라의 작품이 트라우마를 극복하려는 노력이라면, 그것이 폭로하는 것은 트라우마를 강요하는 홀로코스트 교육의 폭력성이겠지요. 뉴욕 유태인 박물관의 전시회를 반대한 한 홀로코스트 생존자가 한 다음의 발언이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불경스러운 작품들은 끔찍함을 보여주지 않아요. 끔찍함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다음 세대들이 홀로코스트를 어떻게 받아들이겠어요?"
But, she said, irreverent works like these ''won't show the horror,'' adding, ''What is the next generation going to make of the Holocaust if they don't see the horror?''
(http://query.nytimes.com/gst/fullpage.html?res=9C0CE5D61131F931A35750C0A9649C8B63&scp=4&sq=Zbigniew%20Libera&st=cse)
홀로코스트 교육도 여느 교육과 마찬가지로 일정한 가치관을 전달하고 그 가치관에 의해 일정한 질서를 정당화 하겠지요. 그런데 그런 교육이 트라우마에 의해 이루어질 때, 전달되는 가치관은 즉각적인 수용만이 허락될 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지요.
이런 트라우마에 의한 교육이 한국사람들에게 낯선 것은 아니지요.어린 시절, 고우영 화백이 그린 반공소년 이승복군에 대한 만화를 보고,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치는 바람에 무장공비에게 입이 찢겨져 죽은 이승복 어린이의 피가 흥건한 찢겨져 나간 입언저리와 땅바닥에 흐르던 시뻘건 피(당연히 까만 잉크색이었겠지만)의 이미지가 아직도 머리 속에 선명히 각인되어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겠지요. 한 때 시끄러웠던 이승복사건 오보논란도 실은 정확한 진실이 무엇이냐의 문제이기보다는 이 트라우마 지우기의 문제였을 겁니다.
한국에서의 트라우마는 반공독재체제를 정당화하는데 사용되었지요. 홀로코스트교육의 트라우마는 대개의 경우 자유주의적 정치체제를 정당화하는데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과는 다르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과연 다를까요? 홀로코스트 교육과 정치적 자유주의의 관계가 꼭 필연적인 것일까요?
리베라가 홀로코스트 교육의 트라우마를 경험한 9살 때는 1968년, 폴란드가 아직 공산당의 일당독재하에 있었을 때입니다. 그 당시의 홀로코스트 교육은 당연히 공산당의 통치를 정당화하는 데 이용되었겠지요.
그리고 지금도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탄압을 홀로코스트에 대한 기억으로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이 것들이 홀로코스트 교육과 정치적 자유주의의 관계가 필연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들일 것입니다. 아직까지는 일부의 경우에 불과하지만 만약 홀로코스트 교육이 본격적으로 정치적 자유주의와 분리되기 시작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홀로코스트 교육이 강요하는 트라우마는 그것에 대한 비판적인 접근을 어렵게 할 것입니다.
사실 불길한 징후들이 없지는 않습니다. 그 자신이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아들인 Norman Finkelstein은 'The Holocaust Industry: Reflections on the Exploitation of Jewish Suffering'라는 책을 써서 홀로코스트가 이스라엘에게 면죄부를 주는 이데올로기적 무기로 사용되고 있으며, 홀로코스트와 관련해서 독일기업과 스위스 은행으로부터 받아낸 보상금이 실제 희생자에게 돌아가지 않고 관련 유태인단체들의 배만 불리고 있다는 비판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신성모독에 대한 벌로 정교수 임용에서 탈락하고 교수직을 상실했습니다.
http://en.wikipedia.org/wiki/Norman_Finkelstein
그리고 트라우마에 근거한 정치적 자유주의의 옹호가 왜 위험한 지는 911 이후의 미국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2002년 2월 미국의 학자, 지식인 60 명은 부시의 테러와의 전쟁에 홉스주의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What we're fighting for'라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http://www.americanvalues.org/html/what_we_re_fighting_for.html
우리에게 관용적이지 않은 자에 대해 관용적일 수 없다고 선언하는 문제의 성명은 원래는 공포에 근거해 평화와 안정을 추구하는 홉스적 자유주의를 군사적 모험주의와 사찰국가 강화를 옹호하는 것으로 전환시킴으로서 홉스주의의 파산을 선언한 문서이기도 합니다.
홉스주의는 부자연적이고 갑작스런 죽음에 대한 공포를 강조함으로써 타자에 대한 관용과 기존정치질서에 대한 순종을 설득합니다. 그래서 홉스주의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토대로 그 위에 권태의 왕국를 건설하려는 기획입니다.
홉스주의가 권태의 왕국을 건설하고 유지를 할 수 있다면(물론 그것도 나름데로 비판할 수 있지만), 최소한 자신의 존재의미는 충족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홉스주의가 토대로 삼으려고한 공포는 오히려 홉스주의적 질서를 위협할 수 있습니다.
공포에 질린 사람이 때때로 세상에서 제일 공격적이고 위험한 사람일 수 있으니까요.
저 위에 테러와의 전쟁을 홉스주의적으로 정당화한 성명은 바로 그런 가능성을 실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유사한 과정은 이스라엘에서는 이미 완성되었겠지요.
만약 홀로코스트와 홀로코스트의 정치적 이용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면, 그래서 홀로코스트의 정치적 이용을 비판과 이성적 담론의 영역에 포함시키고 싶다면 홀로코스트의 트라우마를 어떻게든 해결할 필요가 있을 겁니다. 그리고 거기에 즈비그녜프 리베라의 레고 집단수용소가 홀로코스트의 신성한 트라우마를 가지고 놀면서 극복하려는 시도가 의미있을 겁니다.
그리고 또 하나 던져볼 수 있는 질문은 홀로코스트 교육이 목표로 삼는 "Never Again!", 즉 홀로코스트와 같은 사태의 재발을 막는데 홀로코스트 교육이 과연 얼마나 기여를 할까 하는 것입니다.
나치의 집권과 홀로코스트는 대공황과 이차대전에 따른 정치 경제 질서의 총체적인 붕괴 속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런 총제적 붕괴가 없을 때 홀로코스트의 위험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기우일 수 있고, 그런 붕괴가 왔을 때 "Never Again!'의 구호는 공허하고 무력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어쩌면 "Never Again!"을 외치는 사람들은 스스로 트라우마에 사로잡혀 강박적 반복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지요.
홀로코스트의 재발을 막기 위해 더 필요한 것은 트라우마를 동원한 선악의 이분법보다는 그런 정치 경제적 붕괴를 막기 위한 세심한 관리일지 모릅니다. 그런데 홀로코스트 교육이 문제를 악한 자를 찾아 제어하는 것으로 환원시킨다면, 홀로코스트를 가능하게 했던 정치경제적 조건에 대해 시선을 돌리는 것을 오히려 어렵게 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그런데 세상을 둘러보니 이미 세계적 경제 위기는 시작되었고(다행히 아직 대공황 수준은 아니지만), 또 한 번의 세계대전을 꿈꾸는 네오콘들이 설치고 있네요.
만약 홀로코스트가 다시 온다면 같은 이름으로 오지는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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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라의 레고 집단수용소를 소개한 포스팅에서 점선 아래 부분은 리베라의 작품이 아닙니다. 리베라의 작품을 찾다가 우연히 발견한 것인데, 레고 매니아들의 싸이트에서 활동하는 'Yoshi X'라는 이름을 쓰는 사람의 작품입니다. 아무래도 리베라의 영향을 받아 만든 것이겠지요. 그러나 원래 레고 매니아이다보니 리베라에 비해 상당히 더 정교하게 만들었습니다. 2010년 11월 20일에 올린 것이니 상당히 최근 작품이군요.
다음 링크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http://www.mocpages.com/moc.php/237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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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부 그래이브 수용소에서 미군이 수감자를 학대하는 장면을 레고로 재현한 작품도 있군요. 이것도 리베라의 영향을 받은 것이겠지요.
http://thelede.blogs.nytimes.com/2009/05/05/visualizing-torture-with-lego/?scp=1&sq=Zbigniew%20Libera&st=cse

저 싸이트에서 한 독자가 남긴 댓글이 이 작품을 가장 잘 표현해주는 것 같군요.
"즈비그녜프 리베라를 흉내낸 것이 명백하지만, 그래도 역시 통렬하다. 나는 악의 진부함을 이 것보다 더 강력하게 전달하는 방법을 생각할 수 없다."
May 5, 2009 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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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http://en.wikipedia.org/wiki/Zbigniew_Libera
http://raster.art.pl/gallery/artists/libera/prace.htm
http://users.erols.com/kennrice/lego-kz.htm
http://www.othervoices.org/2.1/feinstein/auschwitz.html#N4
http://www.artmargins.com/index.php/archive/531-spirituality-is-embarrassing-on-zbigniew-libera
http://modiya.nyu.edu/handle/1964/256
New York Times 기사들
2002년 1월 29일
CRITIC'S NOTEBOOK; Jewish Museum Show Looks Nazis in the Face and Creates a Fuss
2002년 2월 6일
Man Behind a Museum Tempest; A Curator Defends His Show Exploring Nazi Imagery
2002년 3월 2일
Jewish Museum to Add Warning Label on Its Show
2002년 3월 17일
Art/Architecture; Peering Under the Skin of Monsters
2002년 3월 15일
ART REVIEW; Evil, the Nazis and Shock Value
리베라의 강연
University of Michigan, School of Art and Design, 1.19.2006
악센트있는 영어라서 듣기에 좀 어려울 수도 있지만, 리베라가 직접 하는 강연입니다.
폴란드에서 전위예술가들에 대한 공격이 주제입니다.
그리고 리베라가 인터뷰에서 자신이 독에 물들었다고 한 것이 무슨 뜻인지를 설명한 것이 있네요. 늦게 발견해서 이 글을 쓰는데 참고하지는 못했지만, 역시 아슈비츠 견학에서 받은 트라우마를 이야기하고 있군요.
# by | 2011/03/09 11:27 | 인형사 찾기 | 트랙백(2) | 핑백(2) | 덧글(83)
















































Even though this is a clear Zbigniew Libera rip-off, it is still poignant. I can’t think of a more forceful way to convey the banality of evil.
And yes, people, what the Bushies authorized and practiced _is_ torture. No question about it.
— Pseudo_Jank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