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5월 22일
확률과 생명의 가치 (2008.5.12)
이번 미국소 수입사태는 결국 정부와 국민사이의 목숨값 흥정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정부는 기존에 국민에게 제공하고 있던 광우병 위험에 대한 안전도를 줄인 것이고 국민들은 여기에 반발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확률 자체가 아주 작은 위험인 것이 왜 이리 큰 문제를 일으켰는 지 의아해 하는 사람들도 많은 것 같다.
일단 문제는 위험의 절대치가 아니라 그것이 상대적으로 증가했다는 것이다. 이 상대적인 증가는 국가가 국민의 공공안전을 위해 지출할 용의가 있는 비용이 줄었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위험을 예방하기 위한 지출이 현상유지하거나 증가할 때는 이는 위험과 비용의 분석을 통해 이해될 수 있는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이 비용이 줄어들 때는 이와는 별도로 생명의 존엄이라는 전혀 이질적인 차원이 개입하게 되고 그것이 이번 사태가 가진 폭발력의 원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러한 추론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위험의 확률과 그 위험을 예방하기 위해 지출하는 비용 사이에서 사람의 목숨을 지키기 위한 비용이 나온다. 근데 이 비용이 목숨값을 바로 결정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100원을 지출한다고 하자. 이 경우 사람의 목숨값은 100원이 아니라 100 원 이상이 된다. 여기서 "이상"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100원은 제한된 자원하에서 끌 수 있는 최선일 뿐이다. 여건이 헝용된다면 얼마든지 더 쓸 수 있는 부분이다. 원래 진인사대천명인 것이다
그런데 이 '이상'이라고 하는 규정되지 않은 여분의 영역이 생명의 존엄이라든지, 생명의 가치는 헤아릴 수 없다든지 하는 명제가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이 되는 것이다. 무한한 가치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100원만 썼다고 하여 그것이 문제는 아니다. 오히려 남는 장사인 것이다.
이런 비용지출이 일정하거나 증가하는 경우는 이런 계량할 수 없는 생명가치의 무한함은 유지된다. 그리고 그 지출이 늘었다고 생명의 가치가 따라 증가하는 것도 아니다. 계속 무한대인 것이다.
그런데 그 지출이 줄어들 경우에 전혀 다른 현상이 생긴다. 생명을 구하기 위해 얼마 이상을 쓸 수 없다하면 바로 그 순간 목숨의 가치는 그 계량할 수 없는 속성을 상실하고 정확하게 지출된 비용과 일치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비용지출이 99원이 되어서 1% 줄었다고 생명의 가치가 1% 주는 것이 아니다. 무한대까지 갈 수 있는 생명의 가치가 딱 99원으로 고정이 되는 것이다. 99원을 무한대로 나누면 0이므로 생명의 가치는 그 전에 비해 0%로 줄어든 것이다.
아마 국민들이 이번 광우병 사태에서 느끼고 있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무엇이든 해줄 수 있다고 이야기할 때 그것은 사랑의 무한함을 표현하는 말이다. 그러나 세상에 무한한 것은 없다. 어디엔가 한계는 존재한다. 그러나 그 유한한 한계를 넘지 않는 한 사랑은 무한한 것이다. 그 한계의 존재가 확인될 때 사랑은 무한함을 상실하고 사라진다.
모든 사회적 연대는 이러한 모호성을 구조적으로 내재하고 있어야만 유지된다. 그것은 국가와 국민간의 정치적 연대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번 사태에서 정부는 그 모호함을 제거한 것이다.
정부는 기존에 국민에게 제공하고 있던 광우병 위험에 대한 안전도를 줄인 것이고 국민들은 여기에 반발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확률 자체가 아주 작은 위험인 것이 왜 이리 큰 문제를 일으켰는 지 의아해 하는 사람들도 많은 것 같다.
일단 문제는 위험의 절대치가 아니라 그것이 상대적으로 증가했다는 것이다. 이 상대적인 증가는 국가가 국민의 공공안전을 위해 지출할 용의가 있는 비용이 줄었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위험을 예방하기 위한 지출이 현상유지하거나 증가할 때는 이는 위험과 비용의 분석을 통해 이해될 수 있는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이 비용이 줄어들 때는 이와는 별도로 생명의 존엄이라는 전혀 이질적인 차원이 개입하게 되고 그것이 이번 사태가 가진 폭발력의 원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러한 추론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위험의 확률과 그 위험을 예방하기 위해 지출하는 비용 사이에서 사람의 목숨을 지키기 위한 비용이 나온다. 근데 이 비용이 목숨값을 바로 결정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100원을 지출한다고 하자. 이 경우 사람의 목숨값은 100원이 아니라 100 원 이상이 된다. 여기서 "이상"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100원은 제한된 자원하에서 끌 수 있는 최선일 뿐이다. 여건이 헝용된다면 얼마든지 더 쓸 수 있는 부분이다. 원래 진인사대천명인 것이다
그런데 이 '이상'이라고 하는 규정되지 않은 여분의 영역이 생명의 존엄이라든지, 생명의 가치는 헤아릴 수 없다든지 하는 명제가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이 되는 것이다. 무한한 가치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100원만 썼다고 하여 그것이 문제는 아니다. 오히려 남는 장사인 것이다.
이런 비용지출이 일정하거나 증가하는 경우는 이런 계량할 수 없는 생명가치의 무한함은 유지된다. 그리고 그 지출이 늘었다고 생명의 가치가 따라 증가하는 것도 아니다. 계속 무한대인 것이다.
그런데 그 지출이 줄어들 경우에 전혀 다른 현상이 생긴다. 생명을 구하기 위해 얼마 이상을 쓸 수 없다하면 바로 그 순간 목숨의 가치는 그 계량할 수 없는 속성을 상실하고 정확하게 지출된 비용과 일치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비용지출이 99원이 되어서 1% 줄었다고 생명의 가치가 1% 주는 것이 아니다. 무한대까지 갈 수 있는 생명의 가치가 딱 99원으로 고정이 되는 것이다. 99원을 무한대로 나누면 0이므로 생명의 가치는 그 전에 비해 0%로 줄어든 것이다.
아마 국민들이 이번 광우병 사태에서 느끼고 있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무엇이든 해줄 수 있다고 이야기할 때 그것은 사랑의 무한함을 표현하는 말이다. 그러나 세상에 무한한 것은 없다. 어디엔가 한계는 존재한다. 그러나 그 유한한 한계를 넘지 않는 한 사랑은 무한한 것이다. 그 한계의 존재가 확인될 때 사랑은 무한함을 상실하고 사라진다.
모든 사회적 연대는 이러한 모호성을 구조적으로 내재하고 있어야만 유지된다. 그것은 국가와 국민간의 정치적 연대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번 사태에서 정부는 그 모호함을 제거한 것이다.
# by | 2008/05/22 05:54 | 인형사 찾기 | 트랙백 | 덧글(0)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