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철은 사이코패스인가? (2005.4.20)

4월 10일자 KBS 스페셜, '악의 가면, 사이코패스'를 보았다. 유영철 사건의 경과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터이라 주의 깊게 보았다. 그리고 할 말이 많았다. 그 말들을 하기 위해 일단 이전에 유영철 사건에 대해 썼던 글을 옮겨 와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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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유영철과 지존파, 그리고 영화 이야기 하나

일전에 영화방에 올렸던 글입니다. 유영철 사건과 같은 것이 언제가는 한국에서도 일어날 것이라는 제 우려가 불행히도 맞은 것 같군요. 한 사회를 묶어주는 합의의 끈이 끊어지고 아노미 상태로 빠지면 당연히 예상할 수 있는 일입니다.

사실 이번 사건은 두 번째입니다. 첫 번째는 지존파 사건으로 보아하지 않을까 생각이 되는군요. 그 당시에 사건의 소식을 접하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었습니다. 금품을 노린 범죄이기는 하였지만, 아마 계층적 증오가 범죄의 주요한 동기중의 하나로 드러난 한국 최초의 사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범인의 대부분이 전직 웨이터 등으로 유흥업소에 종사하던 자들로서 빈부의 격차가 가장 천박하고 추악하게 드러나는 현장을 경험한 사람들이었고, 아마 거기서 그들의 증오가 싹텄을지도 모릅니다. 오렌지족과 부자들을 죽여 버리겠다고 하였다가 결국 애꿎은 사람들만 잡았었지요.

만약 사회가 스스로에 대해 자신이 있다면 이 사건을 비록 아무리 끔찍하더라 하여도 결국은 20대 전후 젊은이들의 아직 성숙하지 않은 마음이 저지른 실수로 관대하고 대범하게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사회와 정부가 보인 대응은 공포와 증오에 쌓인 공황이었습니다. 재판, 판결, 사형집행까지 일사천리로 진행해 버렸었죠.

누가 정해놓은 것은 아니지만 한국 사회에 통용되는 흉악범에 대한 어떤 관행이 있지요. 아무리 흉악한 범죄를 저질렀어도 감옥에 있는 동안 종교에 귀의하고, 자신의 범죄에 대해 참회와 사과를 하고 자신의 처형 후에는 장기기증을 결정하지요. 그러면 여론도 어느 정도는 동정적으로 변하고, 그의 처형 후에는 사형수의 장기를 기증 받고 목숨을 살린 사람에 대한 기사가 신문에 등장하지요. 자신이 죽인 목숨에 대해 다른 목숨을 살림으로 갚음을 했다는 식의 기사가 나오지요. 아마 극형에 처하는 사람들과 화해를 하고 비록 사후에라도 다시 사회내로 받아들이는 의식이라고 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존파의 경우도 주범을 제외한 나머지 모두가 같은 식으로 종교를 받아들이고 장기기증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그와 같은 화해의 기제가 별로 작동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반대로 사회의 범죄에 대한 태도, 특히 지존파의 증오의 대상이었던 사람들의 태도가 변하지 않았나 하는 우려가 듭니다. 범죄를 더 이상 사회의 주변적 현상으로 여기지 않고, 자신들에 대한 직접적이고 현실적인 위협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비주류의 다양한 불만과 요구를 지존파와 같은 범죄와 동일시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가 들었습니다. 이런 우려를 더 크게 한 것은 사형 기결수에 대한 집단처형이었습니다.

한국은 사형제도가 존재하고 사형판결도 내리는 나라입니다. 그러나 그 집행에서는 주저함이 있는 나라입니다. 그것이 어떤 의식적인 정책에 의한 것 아니라고 하더군요. 사형판결이 확정된 경우도 그 집행에 있어서는 법무부장관의 명령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한국의 역대 법무부장관들은 대개 자신의 재임중에 자신의 이름으로 사형집행을 명령하는 것을 꺼린다고 하는군요. 그래서 질질 끌다가 후임자에게 넘겨버린다는군요. 그렇게 몇 번의 장관이 바뀌다 보면 적체된 사형수가 너무 많아지게 되고 결국은 누군가가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전임자가 했어야할 몫까지 사형집행을 명하게 된다고 하더군요. 결국 사형집행은 마찬가지로 하는 것이지만, 사형수의 입장에서는 감형이나 재심의 기회가 조금은 더 주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실제로 감형이나 재심의 혜택을 보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마 별로 많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형집행의 주저함이 아무런 실질적인 효과가 없는 시간 끌기에 불과하다하여도 사람 죽이는 것을 어려워하는 마음가짐과 태도 자체는 결코 나쁜 것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지존파 사건이 있은 후 지존파 사건 관련자뿐만 아니라 그때까지 집행이 미루어져왔던 사형수 수십 명에 대한 사형집행이 당시 대통령이었던 김영삼씨의 지시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수식을 접하고는 참담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아무리 흉악한 범죄라 하더라도 한 사회가 범죄 몇 건 때문에 망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한 사회의 지도층이 국민 대다수를 적으로 보고 두려워하고 증오한다면 그 사회는 희망이 없습니다. 지존파사건과 그리고 이제 막 밝혀진 유영철 사건이 한국의 지도층들을 그런 방향으로 몰고 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이 강하게 듭니다.

이미 계층적 증오라는 화두는 던져졌습니다. 이 사건이 계층적 증오의 결과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계층적 증오는 범죄자의 핑계에 불과하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계층적 증오가 실체가 있는 것인지 있다면 그 정체가 무엇인지도 중요하게 물어보아야할 것입니다. 일부에게는 정당한 계층적 불만도 이런 사건의 예를 들면서 범죄적이라고 비난할 유혹에 빠지기도 할 것입니다. 일부는 범죄로까지 표현되는 계층적 갈등의 심각함을 인식하고 그 해결에 노력하려고 할 것입니다, 또 일부는 계층적 증오와 범죄의 관련을 부정하면서 기존체제의 정당함을 옹호하려고도 할 것입니다. 또 일부는 그 관련을 부정하면서 기존체제에 대한 도전의 도덕적 순결함을 수호하려고도 할 것입니다. 아마 이번 사건은 그 진실이 어떠하건 상관이 없이 한국사회 자체에 던져진 질문인지도 모릅니다.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하느냐에 따라 없는 증오가 생길 수도 있고, 있는 증오가 없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크게 희망적인 생각은 들지 않는군요.

다음은 얼마 전에 이곳 영화방에 올렸던 글입니다. 이번 사건과 관련하여 의미가 있을 것 같아 옮겨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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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판사와 살인자(Le Juge et L'Assassin)-





Bertrand Tavernier는 문제작을 많이 만들어내는 기량 있는 프랑스 감독인데, 우리나라에는 별로 소개가 되어있지 않은 것 같군요. 최근에 Tavernier의 작품들이 많이 인터넷에 릴리즈되어 반가웠는데 자막이 없는 작품들이 많아 아쉬웠습니다.

1976년작인 '판사와 살인자(Le Juge et L'Assassin)'는 제가 본 그의 작품 중 제일 인상 깊게 본 영화입니다. 19세기말 프랑스에 실제로 있었던 연쇄살인사건을 배경으로 한 것으로, 정신병자인 범인과 그를 취조하는 판사와의 관계를 소재로 한 영화입니다. 우리나라 영화 '살인의 추억'처럼 살인사건을 통해 살인사건 보다는 그 시대 사회의 왜곡된 모습을 드러내 보이고자 시도한 작품인데 제가 보기에는 '살인의 추억' 보다 그 시도에 훨씬 더 성공한 작품입니다. 한 광인의 횡설수설을 통해 그 사회의 모순과 아픔을 비춰 보려는 일종의 사회비평 영화라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젊은 날의 이사벨르 위뻬르(Isabelle Huppert)의 모습도 엿볼 수 있습니다.

프랑스 육군의 상사인 조셉 부비에는 짝사랑하던 여자가 청혼을 거절하자 그녀를 권총으로 쏘고 자기 머리에도 총을 쏘아 자살을 기도합니다. 그러나 운이 좋게도 두 사람 다 목숨을 건집니다. 부비에는 일시적 심신상실로 판정되어 감옥에 가는 대신 정신병원에 보내지게 되고, 정신병원에서 3 개월을 보낸 후 부비에는 머릿속에 박힌 두발의 총알도 제거하지 않은 채 정상으로 판정받고 퇴원합니다. 그 후 부비에는 1893년에서 1898년 사이 프랑스 남부지방을 부랑자로 전전하며 혼자 있는 양치기 소년 소녀들을 골라 강간살인에 시체를 난자하는 엽기적인 연쇄살인행각을 벌입니다. 그가 체포될 때까지 12명의 희생자가 그에 의해 죽음을 당합니다.

이 시기의 프랑스는 빠리꼬뮨의 상처가 아직 채 아물기 전이었으며, 드레퓨스 사건의 와중에서 극도의 국론분열에 휩쓸려 있었고, 당시 아나키스트들의 테러공세에 의해 공화국 대통령까지 암살을 당해 민심이 흉흉하던 시기였습니다.

이런 시대의 혼란상은 광인 부비에의 횡설수설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신의 아나키스트라고 선언하며 당시 유행하던 혁명가을 읊조립니다. 성모 마리아를 지극히 숭배하여 당시 성모 마리아가 출현하였다고 하여 가톨릭 신자들의 순례지가 된 루드르를 찾아가기도 하지만, 종교와 성직자에 대해서는 극도의 증오심을 드러냅니다. 또한 자신을 잔 다르크에 비교를 하면서 자신의 살인행각을 잔 다르크처럼 신의 부름을 받고 행한 소명이라고 강변하는가하면, 또 반대로 자신은 광인이기 때문에 자신의 행동에 책임이 없다고 강변하기도 합니다. 그는 자신이 어릴 때 광견병에 걸린 개에게 물렸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또 자신이 광인인데도 불구하고 제대로 치료하지 않고 퇴원시킨 정신병원의 의사들이 진정한 살인범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광인의 이런 횡설수설은 실은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이야기들의 혼란스러운 뒤섞임에 불과하지만, 어쩌면 제 정신으로 걸러지지 않은 이야기이기 때문에 주변 세상의 모순과 어리석음을 그대로 비쳐주는 거울인지도 모릅니다. 또한 살인을 한 다음에는 스스로도 괴로워서 들판을 뒹굴면서 고함을 지르는 모습에서는 사악한 범죄자라기보다는 세상을 감당할 수 없어 어쩔 줄 몰라 하는 연약한 영혼의 방황을 보는 것 같습니다.

체포된 부비에를 담당하게 되는 판사인 에밀 루쏘는 자기 일에 충실한 소시민적인 사람입니다. 이미 많은 나이에 어머니를 아직 모시고 살고 있으며 사귀는 애인이 있지만 어머니를 불편하게 할까봐 집에 데리고 와 인사를 시키지도 못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소시민적인 평범함과 안정 속에 안주하고 있는 사람에게 부비에가 의미하는 것은 기존질서를 위협하는 모든 악들이 한 사람을 통해 응축되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가 두려워하고 경멸하는 하층민의 혁명적 정치운동, 하층민의 범죄성, 지적 도덕적 타락이 부비에 한 사람을 통해 모두 동시에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가 적대시하는 이런 모든 것들이 부비에 한사람을 통해 드러날 때 그 자신의 편견과 적대감은 정당성을 획득하게 되고, 그는 자기반성의 의무에서 해방되고 누리는 자로서의 죄책감에서 벋어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판사는 정신병원에 보내야 될 사람을 재판에 걸어 기요틴에 보내고 맙니다.

그러나 스스로 아나키스트고 순교자임을 자처하던 광인은 아나키스트도 순교자도 아니었지만 처형당함으로써 진짜 순교자가 되고 맙니다. 처음에는 그의 처형을 환영하던 여론은 결국 동정적으로 변하여 부비에를 박해받는 민중의 순교자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파업이 벌어지는 현장에서 부비에가 즐겨 부르던 혁명가가 울려 퍼지게 됩니다.

역사를 공부하면서 미처 생각지 못하던 곳에서 한국 현대사의 특수성을 발견하여 놀라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이 영화에서 보이는 사회 기득권층의 하층민에 대한 몰이해, 불신, 경멸, 두려움, 적대감, 특히 정치적 급진주의와 하층민의 범죄, 지적 도덕적 열등성을 관련지어 폄하하고 적대시하는 것은 다른 나라의 근대화 과정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현상이었습니다. 이에 비하면 한국의 경우 계층 간의 거리나 갈등이 아무리 심한 경우라도 다른 많은 나라의 예와 비교해 보면 거의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미약하다는 것이 제 판단입니다. 한국에서의 계층갈등은 아직도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픈 정도의 수준이지 이 영화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넘을 수 없는 몰이해와 적대감의 벽이 있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상류층의 하류층에 대한 의식도 경멸이나 우월감, 몰이해는 있어도 아직 두려움이나 적대감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다만 두려운 것은 한국 사회에서도 이런 계층 간의 벽이 점점 높이 쌓아올려지고 있지 않나 하는 것입니다.

이 영화에서 보이는 모습이 한국사회의 Back to the Future가 아니기를 기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영화에서 부비에가 즐겨 읊조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노동자들이 파업현장에서 부르는 혁명가의 가사를 번역해서 올려봅니다.


내 사랑이여 우리는 복도 없네.
전쟁이 터졌는데 우리는 젊었다네.

70년의 겨울은 고통으로 가득 찼네.
봄이 왔건만 더 나빠지기만 했다네.

라일락이 벨빌의 언덕을 가득 덮었고
몽마르트의 언덕바지와 뮈동의 숲을 가득 채웠지.

좋은 시절이라면 우리는 꽃을 따러 갔겠지만,
우리는 꼬문을 위해 싸운다.
우리는 승리하리라!

동지가 말했네.
“베르사이유의 악당들이 빠리로 쳐들어온다.”

당신이 말했네.
“당신과 함께 바리케이드로 가겠어요,
아내가 있을 곳은 남편 곁이니까요.“


P.S. 저는 이 영화를 아주 감명 깊게 보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봤으면 하는 것이 저의 바람입니다. 당나귀를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씨네스트에 가시면 영어자막을 찾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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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철 사건을 처음 접했을 때 드디어 한국에도 부비에가 등장하였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부비에가 부비에인 이유는 루쏘 판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과연 한국에서도 루쏘 판사가 등장할 것인지가 그 후 나의 큰 관심사였다.

여론이 그에 대해 보인 적대와 증오는 그의 범죄의 흉악함에 비추어보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의 범죄를 부자에 대한 증오를 부추긴 소위 좌파의 책임으로 몰아가려는 글들이 일부 인터넷에서 발견되었지만, 크게 호응을 받은 것 같지는 않았고, 오히려 그에 대한 증오에 동참함으로 해서 공동체의 동질감을 확인하려는 기제가 작동하는 것도 느껴졌다. 여기까지는 어떤 흉악범에 대해서도 기대할 수 있는 반응이었다. 그리고 수사와 재판과정에서 그가 보인 횡설수설과 기행들, 특히 재판을 거부하고 재판장에게 뛰어든 행위 등은 그에 대한 증오를 어느 정도는 맥 빠지게 했고, 결국 그의 범죄를 그저 한 광인의 일탈행위로 치부하는 것을 쉽게 하기도 한 것 같다. 이 과정에서 특별히 루쏘 판사의 역할을 하는 사람은 눈에 띄지 않았고, 그래서 이번 사건은 이렇게 무사히 지나가나 보다고 생각하고 안도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안도하고 있는 나의 뒤통수를 친 것은 4월 10일자 KBS 스페셜, '악의 가면, 사이코패스'라는 프로였다. 그 프로에서 나는 바로 한국의 루쏘 판사를 만났다.

이 프로는 카나다의 범죄심리학자이고 미국 연방수사국(FBI)의 고문으로 있는 로버트 헤어(Robert Hare) 박사가 만든 사이코패스라는 개념을 설명하면서 유영철과 같은 범죄자가 전형적인 사이코패스의 예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유영철과 같이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의 심리구조가 소위 정상인들과 다른 드물고 특별한 것이리라는 점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이 프로에서 제시한 사이코패스라는 개념은 범죄와 정신 병리 그리고 정치적 급진성을 등치시켰다는 점에서 무척 위험한 개념이며, 루쏘 판사가 만들었을 직한 개념이다. 이 사이코패스라는 개념이 가지고 있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함축을 헤아려 본 후 나는 등골이 오싹해짐을 느꼈다.

이 프로에서 제시한 사이코패스의 개념은 대략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있는 것 같다. 첫째는 사이코패스는 양심이 없고 타인의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사이코패스는 타인을 지배하는 것에서 성적인 쾌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셋째는 사이코패스는 자신의 행동을 부당한 사회에 대한 저항으로 합리화한다는 것이다.

이런 세 가지 요소들이 서로 모순 없이 조합될 수 있는 것인지는 조금 있다가 다루도록 하겠다. 우선 문제 삼고자 하는 것은 이 프로에서 사이코패스를 유전적으로 결정된 뇌의 생화학적 조건으로 설정하는 것이다. 즉 사이코패스에게는 일정한 유전자 변이에 의해 뇌에서 신경정보를 전달하는 화학물질인 세라토닌의 분비가 적다는 것이다. 그 결과 감정을 느끼는 기능이 현저하게 저하되며, 특히 타인의 고통과 슬픔에 대해 둔감한 냉혈적 인간이 되고 공격성이 강화된다는 것이다. 세라토닌 결핍이라고 하는 이런 생화학적 조건과 사이코패스라고 하는 심리적 현상과의 사이에 직접적인 인과관계를 설정할 수 있는 지에 대해서는 상당한 논란이 있을 수 있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다만 심리적 현상이 뇌의 생화학적 조건으로 환원될 수 있는지는 심리학 분야에서 중요한 논쟁거리라는 이야기는 귀동냥한 적이 있다. 그리고, 문외한의 소견으로는 심리구조라고 하는 것이 일정하게 경험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구성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심리구조를 생화학적 조건으로 환원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일단 이 프로에서 전제한 생화학적 환원론을 받아들여보자.

생화학적 환원론으로부터 이 프로는 몇 가지 결론을 도출한다. 우선 사이코패스는 정상인과 명확히 구별되는 별종이라는 것이며, 따라서 그들을 찾아내는 것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사이코패스와 정상인 사이에 일정한 연속선이 아니라 급격한 단절을 설정하는 것은 자신을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다수에게 당신은 사이코패스가 아니라는 확인을 해주며, 동시에 소수의 사이코패스에 대해 가책 없는 증오와 예외적 조치를 정당화 한다. 다들 알다시피 근대적 형법체계는 법 앞의 평등을 기본전제로 한다. 이것은 모든 인간이 형법상의 피의자가 될 수 있다는 전제하에서 피의자와 범죄자에 대한 보호가 형법과 형사소소법의 절차 속에 내재되어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그러나 정상인과 구분되는 또 다른 종류의 인간으로서 사이코패스라는 범주를 창설하게 되면, 법 앞의 평등은 파괴되며 사이코패스에 대해 정상인에 대해서는 행할 수 없는 예외적인 조치들이 정당화된다.

그런데 이미 한국의 법체계는 정신장애자에 대한 예외적 조치를 인정하고 있다. 정신장애자는 책임성 조각사유에 해당되어 형벌을 가할 수 없으며 대신 사회보호법에 의해 치료감호처분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사이코패스라는 개념이 제시하는 예외적 조치는 이와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우선 치료감호처분은 치료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므로 치료가 완료되면 수용자를 풀어주어야 한다. 물론 치료가 되지 않는다면 영원히 수용할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이 프로에서는 사이코패스를 형벌에 의해서도 심리적 치료에 의해서도 교정될 수 없는 존재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이코패스에 대해서는 치료가 아니라 영원히 사회로부터 격리하여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영원한 격리는 강제수용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처형도 역시 영원한 격리의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사이코패스의 개념을 살펴보면 처형을 정당화하기 위해 구성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 프로는 사이코패스를 정서적 정보 처리능력이 박약한 사람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 말은 실은 정확히는 정서적 능력만 결여된 사람이라는 뜻이다. 즉 사실관계, 인과관계의 인지능력은 정상이라는 뜻이며 그러므로 형법상 책임성 조각사유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이코패스는 미친놈이기는 하지만 사형시켜도 상관없는 미친놈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정신장애자에 대한 사형도 밥 먹듯이 집행하는 미국의 행태를 정당화하려는 맞춤형 개념이 사이코패스가 아닌가하는 의심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미국은 정신장애자에 대한 처형 때문에 군제사면위로부터 벌써 몇 년째 지적을 받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점이 있다. 사이코패스가 정신장애자를 처형하기 위한 핑계가 아니라고 한 번 설정해보자. 그래서 사이코패스가 충분한 책임능력을 가지는 사람이라면, 그리고그의 범죄행위에 어떠한 처벌이 따라올지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냥 일반 형법에 의해 처벌하면 되는 것이지 굳이 따로 사이코패스라고, 즉 미친놈이라고 따로 규정할 이유와 실익이 어디에 있는 것인가? 사이코패스에 대한 예외적 조치는 무엇에 의해 정당화되는 것인가? 형법은 인간의 행위에 대해서만 처벌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이코패스가 정상인과 다름없는 책임능력을 가졌다면 형법의 일반적인 조치들이 사이코패스에게도 정상인과 똑같은 범죄예방효과를 가진다고 하여야 일관성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이코패스의 개념은 그 이상의 처벌을 정당화한다. 이 잉여의 처벌은 무엇에 대한 처벌인가? 그것은 사이코패스에게 양심이 없다고, 비도덕적이라고 처벌하자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비도덕 비양심은 개인의 양심의 영역이며 법적 판단의 영역과 구별된다는 것이 근대형법의 원칙이다.  사이코패스의 개념이 결국 비양심과 비도덕에 대해 처벌을 하는 것이 된다면 종교재판이 횡행하던 중세적 법질서로 돌아가자는 것이 되는 것은 아닌가? 나쁜 놈이니까 벌을 더 줘야 한다는 괘씸죄를 합리화하는 논리는 아닌가? 정의의 여신은 눈을 가리고 있다. 이는 범죄는 그 행위에 의해서만 판단되어야 하며, 그 행위자가 누구인지는 보지 않아야한다는 것이다. 비록 악마가 재판을 받는 한이 있어도 재판은 악마에게도 공평하여야 하는 것이다.

사이코패스라는 개념이 정당화하는 예외적 조치는 범죄에 대한 과잉처벌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사이코패스의 개념은 아직 범죄를 저지르지 않은 사람에 대한 예방적 구금도 충분히 정당화할 수 있는 개념이다. 그들의 범죄 성향이 명백하며 또 유전자 검사를 통해 그들을 가려낼 수 있다면 이들을 미리 가려내어 그들이 범죄를 저지르기 전에 미리 사회와 격리시키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지 않은가? 이 프로는 이미 영국에서의 전국민의 유전자 정보를 수집관리하는 기구의 설치에 관련된 논의를 소개하면서 이런 해결책을 가리키고 있다. 또한 사이코패스가 유전적으로 결정되는 것이라면 이들이 더 이상 자손을 남기지 못하도록 강제적으로 단종, 불임 시술을 하는 것도 너무나 당연히 요구되지 않는가?

이것만으로도 사이코패스라는 개념은 상당히 음침하다. 위험분자에 대한 예방적 구금, 영원한 격리, 처형, 강제단종 등을 읽어내며 히틀러의 나치독일을 연상하는 것은 나의 과민함 탓일까? 히틀러는 집권하자마자 독일의 정신병자에 대해 강제 단종을 실시했으며, 유태인을 학살하기 이전에 독일인 정신병자들을 먼저 학살하였었다.

그런데 사이코패스가 그들이 설정하는 데로 정상인과 명확히 구분되는 것이라면 그들에 대한 일정한 관리와 조처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다만 그 조치들이 사회의 다른 원칙들과  충돌하지 않게 조정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사이코패스는 정상인과  명확히 구분될 수 있는 것인가?

위에서 정리한 사이코패스를 구성하는 세 가지 요소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살펴보자.

첫째는 사이코패스는 양심이 없고 타인의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사이코패스는 타인을 지배하는 것에서 성적인 쾌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셋째는 사이코패스는 자신의 행동을 부당한 사회에 대한 저항으로 합리화한다는 것이다.

이런 규정은 일견 그럴 듯해 보이지만 따져보기 시작하면 영 요령부득이다. 일단 양심이 없고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지 못한다는 말을 따져보자. 그렇다면 사이코패스가 아닌 정상인은 모든 사람에 대해 감정을 공유한다는 이야기인가?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그 고통을 자신의 것처럼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지만, 그것이 소위 정상인의 보편적 조건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고, 타인과의 사회적 거리에 의해 그 정서적 반응도 달라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족과 같이 무척 가까운 사이의 경우는 정서적 공감도 또한 강하며 또 그 정서적 반응도 격렬하기 마련이다. 사회적 거리가 멀어지는 타인이 되면 점점 무감각해지고 둔감해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현상이다. 전혀 사회적 관계가 없는 타인에 대해 측은지심을 느끼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것을 느끼지 않는다고 하여 특별히 성격장애라고 이야기할 근거는 없다. 원래 그런 것이다. 인간은 원래 적과 친구를 구분하는 법이다. 그러므로 사이코패스에 대해 타인의 감정을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사회적 거리라고 하는 중요한 변수를 사상함으로 해서 어느 누구도 사이코패스로 몰 수 있는 위험한 규정이다.

두 번째로 사이코패스가 타인을 지배하는 것에서 쾌락을 느끼는 사람이라는 규정도 요령부득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사이코패스가 첫 번째 규정대로 타인에 대해 무관심하고 무감각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들이 타인에 대해 지배를 함으로서 쾌락을 느낄 이유도 없는 것이 아닌가? 지배란 타인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생기는 것이다. 타인에 대해 무관심하다면 타인에 대해 우발적 돌발적으로 폭력을 행사하고 피해를 주는 경우가 발생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마치 야생동물의 습격과 같은 것이다. 야생동물이 인간에게 피해를 주어도 그것은 지배관계가 아니다. 그저 한번 스치고 지나가는 우연일 뿐이다.

물론 인간들은 부와 권력을 추구하고 타인에 대한 지배를 추구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이코패스에게만 국한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리고 사이코패스가 타인에 대한 지배를 추구한다면 그것은 그것이 타인에 대해 무관심하기 때문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관계와 관심에 의해 생기는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관계이고 관심인지에 대해 타인에 대한 무관계성을 설정하는 사이코패스의 개념은 아무것도 설명해줄 수 없다.

사실 부와 권력, 명예와 같은 보상을 약속하며 인간들을 그 성취를 위해 노력하게 하는 것은 사회관계의 본질이다. 여기서 인간 상호간의 경쟁, 질투, 증오, 폭력은 자연스럽게 따라 나온다. 특히 현대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사회관계가 경쟁적 시장을 통해 매개됨으로 해서 경쟁과 질투가 강화 확대되는 것이다. 사회라고 하는 것은 원래 일정한 폭력성을 유발할 수밖에 없는 경쟁을 도입하고 또 그 폭력성을 일정하게 억제하면서 유지되어나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이코패스가 가지는 지배의 욕구와 사회관계 자체에 내재된 지배의 욕구를 구분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물론 지배욕구가 타인에 비해 지나치게 강하여 사회관계 전체의 균형을 깨뜨리는 자의 존재를 상정하고 싶다면 상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경우라도 단지 정도의 차이일 뿐이지 사이코패스의 개념이 상정하는 것과 같은 질적인 차이는 아닐 것이다. 결국 사이코패스의 개념이 여기서 시도하고 있는 것은 사회 자체에 내재되어있는 폭력성을 소수의 정신 병리적 위험분자에게 전가하려는 것이고, 그 결과 정상으로 판정받은 다수에게 그 폭력에 대한 책임과 죄책감에 대해 면죄부를 주려는 시도가 아닌가 의심된다. 결국 사회적 문제를 일부 물을 흐리는 소수의 문제로 돌리고, 그들만 때려잡으면 만사형통이라는 이야기가 아닌가?

사회적 문제를 정신병리적 소수의 문제로 환원하려는 시도는 적응적 사이코패스라는 개념에서 절정에 달한다. 이 프로는 전체 인구 중 1% 정도가 사이코패스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면 대한민국에 대략 46만 명 정도의 사이코패스가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유영철은 아직 한 명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럼 나머지 459,999 명의 사이코패스는 어디에 있다는 것인가? 이들에 대해 설명하기 위하여 그들은 적응적 사이코패스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즉 사이코패스의 일부는 엽기적 연쇄살인행각을 벌이지만 나머지는 자신의 부도덕한 지배욕을 사회가 승인한 수단을 통해 부와 권력을 획득함으로 해서 충족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획득한 부와 권력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큰 고통과 피해를 준다는 것이다.  

부와 권력을 추구하면서 다수에게 고통을 안기며 그 고통에 대해서도 무감각한 사람들에게 일말은 동정도 가지지 않지만, 이들을 연쇄살인범과 같은 종류의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이 문제 해결에 얼마나 도움을 줄 수 있으며, 또한 얼마나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표할 수밖에 없다. 일단 한 명의 연쇄살인범을 설명하기 위해서 46만 명을 동일한 범주에 넣어야 하는 개념이 이 한명의 연쇄살인범을 설명할 수 있는 개념이 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명백하다. 이는 마치 유영철이 남자이기 때문에 모든 남자가 잠재적 연쇄살인범이라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고, 더 확대하면 유영철이 인간이므로 모든 인간이 잠재적 연쇄살인범이라고 하는 것 별 차이가 없다. 한 명의 연쇄살인범과 연쇄살인범이 되지 않은 459.999 명 사이의 차이를 구분할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 한 사이코패스라는 개념은 연쇄살인범을 설명하는 데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는 개념이다.

그러나 사이코패스의 개념은 이런 차이를 구분할 기준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그 대신 적응적 사이코패스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범죄를 저지르지 않은 자도 결국 합법적인 방법으로 더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주므로, 범죄를 저지르는 사이코패스와 마찬가지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앞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사회적 문제를 개인의 도덕의 문제로 환원하는 도덕적 엄숙주의이며, 또 개인의 도덕적 문제를 정신병리적 현상으로 환원하는 심리적 환원주의이다. 일단 한 인간이 사회적으로 승인된 수단을 통하여 자신의 욕구를 충족하였다면 그에 대해 또 다시 비난을 하여야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프로이드는 이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 승화(Sublimation)의 개념을 통해 어머니에 대한 금지된 욕구가 아버지에 대한 모방이라는 승인된 욕구로 전화되는 과정을 인격형성의 중요한 기제로 설명하였다. 또한 자본주의적 사익추구를 정당화한 초기의 논자인 멘드빌은 '꿀벌의 우화'를 통해 이윤추구라는 사적 악덕이 공적 미덕을 가져온다고 주장한 바 있다.      

사회구성원들이 사회가 승인한 욕구를 추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일정한 문제가 발생했다면, 그것은 사회구조의 문제이다. 새삼스럽게 행위자들의 동기가 얼마나 도덕적이었느냐를 따지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특히 아는 사람들 사이의 인격적 관계를 대신하여 시장이나 국가와 같은 거대한 비인격화된 제도가 사회관계를 매개하는 현대사회에서 그 구성원들로 하여금 이미 대인관계의 범위를 벋어난 엄청난 숫자의 다중에 대하여 인격적 연대와 정서적 공감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한 요구이다.

결국 적응적 사이코패스의 개념은 사회적 문제를 소수의 정신병리적 현상으로 환원하려는 시도이지만 동시에 모든 사람을 적응적 사이코패스로 몰 수 있는 개념이다.

그런데 이 프로는 후반부에 오면서 그 때까지 한 이야기와 정반대가 되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사이코패스가 유전적으로 결정되며 형벌에 의해서도, 심리적 치료에 의해서도 교정될 수 없는 것이라고 하였었다. 그러나 후반부에 오면서 성장기 환경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아무리 사이코패스의 유전자를 타고났어도, 성장기에 따뜻한 관심과 사랑 속에서 자랄 수 있으면 사이코패스적 성향은 범죄로 나타나지 않으며, 그 대신 사회적응에 성공한 적응적 사이코패스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도 사이코패스의 유전적 본질은 변하지 않으며 적응적 사이코패스로서 타인에게 더 큰 피해를 끼칠 수 있다고 한다.

"좋은 환경에서 자란다면 사회에 적응하는 성공한 사이코패스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사이코패스의 유전적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이 이야기는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전반부에서 제시되지 않았던 연쇄살인을 하는 사이코패스와 적응적 사이코패스와의 차이를 설명하는 틀로서 성장기 환경을 제시했다고 보는 경우이다. 이런 경우는 전반부의 이야기와 크게 차이나는 점이 없게 된다. 적응적 사이코패스도 결국 반사회적이므로 이들까지를 포함해 모두를 사회로부터 격리하여야한다는 결론은 마찬가지로 나온다. 다만 사이코패스의 범죄적 발현만을 막고자 하는 경우 아동에 대해서까지 강제로 의료적 개입을 하여야한다는 더 무시무시한 시나리오가 나올 뿐이다.

그러나 유전적으로 주어진 일정한 뇌의 생화학적 조건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또 그 조건이 행동으로 연결되는데 있어 성장기의 경험이 큰 차이를 가져왔다는 실증적 연구결과의 유효성을 받아들인다고 한다면, 사이코패스에 대해 전혀 다른 개념화가 가능해진다. 즉 사이코패스라는 말로 지칭하는 일정한 유전적 조건은 일정한 성격유형만을 결정해준다는 것이다. 그 성격유형이란, 아마 성취욕이 강하며 또한 원한이 깊은 사람이라고 평할 수 있는 그 무엇일 아닐까 짐작된다. 이런 성격유형은 그 자체로는 부정적일 것도 긍정적일 것도 없는 성향이지만, 성취가 좌절되고 원한이 깊어지면서 타인에 대한 적대감의 강도와 범위가 커질 수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사이코패스라는 무시무시한 이름으로 불러서 문제이지 이런 성격유형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주변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으며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의 성격을 꼭 병리적이라고 규정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 구분하여 격리하여야할 정당성이 존재할 수 있을까?

위에서 지적한 사이코패스 개념이 가지는 많은 문제점들은 결국 이 개념이 인간성에 대한 어떤 환상에 대한 집착에서 나오는 것 같다. 그 환상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사이코패스가 타인의 고통에 동감하며, 타인을 지배하려하며,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려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이런 규정이 전제하는 정상인에 대한 규정도 자동적으로 나온다. 즉 정상인이란 만인을 사랑하는 박애주의자이며, 타인을 지배하려하지 않으며, 자신을 합리화 하지도 않는다. 그는 타인에게서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원한을 품지 않고 반항하지 않으며, 사회의 모든 주어진 규범을 아무 의문 없이 충실히 따르는 자이다. 이러한 존재가 있다는 사람들은 이를 천사라고 부르거나 숙맥이라고 부를 것이다. 이런 개념이 인간의 현실에 대한 의미 있는 설명이 될 수 없다. 사이코패스의 개념을 제시하는 자들은 그들이 꿈꾸는 어떤 이상적 상태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현실의 문제를 제단하려고 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런 이상과 현실의 뒤섞임은 상당히 혼란스럽고 위험하다.

그들은 사이코패스의 개념을 만들어 사회적 문제를 개인의 병리적 문제 환원하여 해결책도 아닌 해결책을 제시하며 자화자찬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 존재하는 것은 도덕적 엄숙주의이고 순결주의이다. 현실의 도덕적 모호성을 그들은 참을 수 없는 것이고 사이코페스라는 개념이 그들에게 제공하는 것은 선악이 분명한 도덕적 명확성이다. 사이코패스라는 악의 상징을 제시함으로 해서 죄책감 없는 증오의 과녁을 제공하며, 이에 대한 증오를 통해 자신이 선하다는 것을 반사적으로 확인받는 지라르적 희생양 만들기이다.

그들은 사이코패스가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한다고 할 때 바로 사이코패스라고 규정한 자들에 대한 그들 자신의 공감을 철회하고 있다. 그럼으로 해서 그들은 그들 스스로를 사이코패스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이코패스의 개념이 증오와 도덕의 그림자놀이에 불과할지라도 그것이 유영철을 이해하는 데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유영철이 한 것은 사이코패스라는 개념을 만들어낸 사람들이 하고 있는 것과 똑같은 증오와 도덕의 그림자놀이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처음 유영철 사건을 들었을 때 나는 그가 광인일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얼마 전에 그가 옥중에서 어떤 기자와 주고받은 편지를 모은 책의 출간을 소개하는 기사에서 일부 발췌된 그의 편지들을 읽고 나서 견해를 바꾸었다. 그는 광인은 아닌 것 같다. 다만 엄청난 증오심에 싸여있는 사람인 것 같다. 그러므로 그에 대한 사형선고는 타당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법은 증오에 대해서는 위법성이나 책임성을 조각하지 않으며, 정상참작의 사유로도 삼지 않는다.

그의 편지는 그가 소위 사이코패스의 범주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뿐이 아니라, 사이코패스의 개념이 왜 성립될 수 없는 지까지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사이코패스의 개념은 타인에 대한 정서적 공감대적 형성하지 못하는 사람을 설정한다. 그러나 유영철은 자신의 아들에 대한 지극한 애정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불우한 성장과정에 비추어보며 자기 자식만은 그렇게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아버지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이의 어머니인 전처에 대해서도 자신에게 처음으로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준 사람으로 그녀에 대한 지극한 애정과 감사도 동시에 표현하고 있다. 그는 정서적 공감능력이 결여된 사람은 아니었다. 반대로 정서적으로 상당히 민감한 사람인 것 같다. 다만 그는 애정에 굶주렸고 그래서 애정에 대한 기대도 그만큼 더 켰으며, 그 애정이 거부되고 배반당할 때 이에 대한 분노와 좌절도 더 큰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의 범죄의 동기는 분노와 증오이다. 그러나 분노와 증오는 사이코패스의 개념이 설정하는 것처럼 무관심과 냉담함에서 나오지 않는다. 분노와 증오는 사랑과 믿음의 이면일 뿐이다.

다음은 유영철이 그의 전처에 대해 쓴 편지의 일부이다.

"애 엄마한테도 실망한 적이 있어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책을 너무 재밌고 감동 있게 봐서 애 엄마에게 읽어 보라고 했더니 “그럴 시간 있으면 한숨 자는 게 낫다”고 해요. 그 얘기를 듣고 얼마나 충격(?)이 컸는지.
그 말 한마디가 그 사람이 나를 만나 얼마나 고생했고, 삶에 찌든 생활을 했는가를 나타내서 많이 속상했었거든요. 아내는 저로 인해 온갖 쓰디쓴 경험의 집대성 같은 결혼생활을 하다 떠나간 겁니다.
연애시절 ‘폐병환자’였던 아내와 ‘프렌치 키스’를 하면서도 전염 같은 건 아예 생각도 안 할 정도로 정말 그 사람을 사랑했었어요. 그 사람의 환경과 그 어떤 아픔까지 전부 사랑했기 때문에 그 사람도 오랜 시간 날 기다려 준 것이 아니었나 하는 늦은 悲哀(비애)가 느껴지네요.
그 사람은 다음 生에 날 만나는 거, 고개를 절레절레 하겠지만 전 그 사람과 다시 만나고 싶습니다. 진정 사랑했기에 슬프네요. "  

그런데 그가 어떻게 좌절을 경험했는지를 살펴보면 재미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가난한 집안 출신의 전과자, 저학력자라는 자신의 처지 자체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불만을 털어놓지 않는다. 자신의 남루한 사회적 지위에 대해서는 오히려 담담하게 수용하는 것 같다. 그가 분노하는 지점은 그가 애정을 구하는 여자가 자기 자신의 순수한 애정을 보지 않고 자신의 조건만을 보고 자신을 거부하는 그 속물성이었다.

"나는 그 옛날 그림이나 그려(대학로에서 캐리커처를 그려 주는 사람들처럼) 깨끗한 돈을 벌고 싶었다. 정말 그 돈으로 굶지 않을 만큼 먹고 살고 싶었다. 그게 이놈의 세상에서 욕심 안 부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제일 깨끗한 일일 거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아내는 원치 않더라. 집을 많이 비우는 웨딩 사진 찍는 일도, 도장 파는 일도, 운전직도, 중장비도, 어느 사장의 비서직도 내가 하는 일마다 탐탁지 않게 생각하더라. 좀더 나은 생활을 영위하고 싶어하는 여자들의 속물근성이 아내에게도 있다는 게 보였을 때 난 내 가정에 安住(안주)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무튼 돈으로 여잘 사고 남잘 얻고 그런 것들을 얻기 위해 너무나 많은 가식을 보이는 사람들(현재도 수없이 그런 채팅으로 밤을 새우는 이들이 많듯이). 그런 돈으로 사람을 저울질한다는 것 때문에 性(성), 命(명), 錢(전)을 경멸했던 것이다. 근본적으로 내가 어떤 여자에게 끌렸던 것은 그 사람의 ‘정신’이라는 얘기다. 어떤 미모나 매력도 순간 외에는 내 마음을 잡진 못했다."

"동거녀와의 관계도 내겐 무의미한 나날이 많았다. 내가 원했던 건 사람과 사람의 情이었고 그 여자가 원한 건 돈이었다. 내 학력과 전과와 이혼남의 전력을 알아 버린 그 여자는 나를 남자로 보지 않았다."

그는 무조건적이며 정신적인 사랑을 갈구 한다고 말했다. 그것이 신포도의 비유처럼 비루한 자신의 처지에 대한 자기합리화일 수도 있다. 그러나 무조건적이며 정신적 사랑의 환상을 쫓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으랴? 그러나 그의 열악한 사회적 지위는 그런 사랑의 환상을 유지하지 못하게 하였다. 자신의 사랑이 자신의 지위 때문에 거부당할 때 그는 자기를 대상으로 보고 이해타산을 따지는 속물성을 보았을 것이다. 그는 자신을 거부하는 여자에게 타락과 기만을 보았고, 온 사회가 이런 타락과 기만으로 가득 차있는 것을 보고 분노하였을 것이다. 분노는 항상 도덕적 내용을 가진다. 유영철의 분노도 아무리 왜곡된 것이라 하여도 도덕적 내용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도덕적 내용은 결벽증적인 도덕적 순결주의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사이코패스의 개념은 유영철의 도덕적 분노를 그의 지배욕과 공격성에 대한 기만적 자기합리화로 볼 것이다. 그러나 그 반대일 수 있다. 그의 도덕적 분노가 그의 공격성과 증오의 진정한 원인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도덕적 분노는 사회 전체를 타락한 것으로 응징의 대상으로 보게 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유영철도 사이코패스의 개념을 만들고 사용하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도덕적 모호성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유영철은 사회를 타락하고 응징되어야 할 것으로 보았고, 마찬가지로 사이코패스의 개념을 만든 사람들은 사이코패스를 교정될 수 없는 사악함으로 보고 격리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 둘은 똑 같이 도덕적 명확성을 추구하며 증오의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성을 매개로 하여 어떻게 신분과 부과 매개되고 교환되는 지에 관해 연구하는 것은 인류학에서는 생 기초이다. 원래 성은 그런 것이다. 그러나 낭만적 사랑의 개념을 받아들이는 우리시대에 있어서 그런 교환은 무조건적이며 이타적인 사랑에 의해 은폐되어야만 수행되는 교환이다. 부디외가 선물에 관한 논의에서 지적하였듯이 선물은 교환임을 은폐하는 형식에 대한 투자를 통해서만 선물이 될 수 있으며 또 교환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선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인심은 곳간에서 나온다는 옛말이 있다. 마찬가지로 사랑의 환상을 유지할 수 있는 형식에의 투자도 여유가 있어야 가능할 것이다. 유영철과 같이 열악한 사회적 지위에 있는 사람에게는 그 만큼 더 형식에 투자할 수 있는 여유가 없을 것이고 그러하기에 사랑의 이중성을 직면해야만 하는 기회도 더 많을 것이다. 바로 사랑 속에 은폐되어 있는 속물성을 보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의 이런 도덕적 모호성이 일정하게 받아들이고 적응하며 살 것이다. 그러나 유영철은 이런 도덕적 모호성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에 사회를 적으로 돌림으로서 자신의 도덕적 명확성을 확보하려고 한 것이다.

결국 유영철도 사이코패스의 개념을 만든 사람들도 도덕적으로 모호한 세상에서 타락한 적을 명백히 규정하고 그들에 대해 적대함으로서 자신의 도덕적 명확성을 확보하려는 지라르적 희생놀이를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디선가 유영철이 자신이 다시 태어난다면 성직자가 되고 싶다고 한다는 것을 보았다. 그를 도덕적 순결주의자라고 보는 나의 판단에 대한 또 하나의 증거가 될 것이다. 그가 세상의 도덕적 모호성을 견딜 수 없는 사람이라면 진짜로 중이나 신부, 수도승이 되는 것이 그의 천성에 맞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가 성직자가 된다면 가혹한 종교재판관이 되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도 든다.

나의 유영철에 대한 재판은 끝났다. 그는 유죄이다. 그의 죄는 자신의 도덕적 순결주의로 세상을 심판하려고한 오만이다. 그 오만이 그의 애정에 대한 굶주림에 의해 추동된 것이 인정된다 하여도 그의 유죄는 변할 수 없다. 그리고 덤으로 사이코패스의 개념으로 유영철을 심판하려한 자들도 유영철과 동일한 죄를 저지른 죄인들이다. 그들도 유죄이다.

유영철에게 정상참작을 해줄 수 있는 여지는 영 없을까? 그러다가 가슴이 섬뜩해지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2003년에 이루어진 결혼 중 8.4%가 국제결혼이고 또 그중 압도적인 다수가 한국남성과 외국여성과의 국제결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외국여성과 결혼하는 한국남성의 대부분이 저소득층으로 한국에서 배우자를 찾을 수 없어 외국에서 신부를 수입한다는 것이다. 내가 본 기사는 이런 외국 여성들의 열악한 법적 지위, 배우자로에 의한 폭력과 착취, 그리고 이런 어려움에 더불어 문화적 단절감으로 인해 발생하는 정신질환 등을 보도하며 그들의 어려운 처지를 알리는 것이었다. 이 기사를 보고 내가 놀란 것은 열악한 사회적 지위 때문에 한국 여자들에게 거부당한 가난한 한국남자들이 최소한 8.4%는 된다는 사실이다. 아마 유영철이 존재하는 위치도 그 근처였을 것 같다. 그런데 옛날에는 아무리 가난하여도 가난한 남자와 가난한 여자가 서로 짝짓고 살았었는데 무엇이 변한 것일까? 내가 궁금한 것은 그 8.4%의 짝이 되었어야할 8.4%의 가난한 여자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이것이 유영철 사건의 또 하나의 배경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by 인형사 | 2005/04/20 00:15 | 옛글 창고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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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김지혜 at 2008/09/16 17:26
와우..... 잘읽었습니다 많은것을 배우게 됐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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