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제국과 대륙제국: 지정학의 화두-북일수교와 남북 철도연결을 보며...

조만간 북한과 일본의 수교가 이루어지고 남북한간의 철도도 연결된다는 소식을 듣고는 여러 가지 생각이 스치는군요. 북한과 일본과의 수교도 사실은 십년전에 이루어질 것이었는데 북한과 일본의 수교협상이 진행되는 와중에 미국이 북한의 핵의혹을 들고 나오는 바람에 좌초되고 말았죠. 남한이 북한의 동맹국인 러시아와 중국과 수교를 했으므로 반대로 남한의 동맹국인 미국과 일본이 북한과 수교하는 것이 동북아 냉전종식과 평화정착의 다음 수순인데 미국이 핵의혹을 일본과 북한의 수교협상과 때를 맞춰 들고 나왔던 것은 북한의 핵보유 가능성 그 자체에 대한 우려 못지 않게 수교협상을 좌절시키고 북한을 계속 고립시키겠다는 의사의 표현으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를 통해 미국은 북일 수교를 효과적으로 저지했습니다. 이는 한반도 평화정착의 대전제로 오래 동안 당사자들간에 합의되었던 주변 사강의 남북한 교차수교라는 대명제에 미국이 참여하지 않겠다는 의사 표시이며 일본에게는 먼저 북한과 수교하여 미국이 수교 압력에 노출되는 불편한 상황을 만들지 말라는 경고로도 볼 수 있습니다. 십년 동안 미국의 눈치만 살피고 허락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던 일본이 더 이상 기다리기를 포기하고 독자적으로 북한과의 수교에 들어갔습니다. 미국의 권위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계적 냉전이 끝난 상황에서 미국이 저렇듯 집요하게 북한의 고립을 고집하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쿠바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그냥 괘씸죄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그런데 북일 수교의 소식과 더불어 전해지는 남북한 철도 연결 소식을 듣고는 미국이 두려워하는 것이 저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학교 다닐 때 정치학 개론을 들어 본 사람이면 기억하는 분들도 계실텐데 지금부터 백년전인 19세기말 20세기 초에 지정학이라는 학문 분야가 처음 정립될 때 두 개의 대립되는 학파가 있었습니다. 그 하나는 미국 해군 장교 출신인 Mahan으로 대변되는 해양제국론입니다. 바다가 육지에 비해 훨씬 효율적인 운송의 매체이므로 강력한 해군으로 제해권을 장악하는 국가가 세계를 제패한다는 이론으로 당시 테오도르 루즈벨트를 비롯한 미국의 식자층에게 영향을 주어 미국이 대양해군을 건설하고 제국주의 경쟁에 뛰어드는데 이론적 기여를 합니다. 그의 이론은 당시 영국과 독일에서도 상당한 주목을 받았고 일차대전 이전의 영독간의 건함 경쟁을 격화시키는데도 일정한 역할을 했다고 하더군요.

이에 대립되는 이론으로는 영국인 Mackinder가 주창한 대륙제국론입니다. 산업혁명에 의한 기술의 발달, 특히 철도의 광범위한 건설은 육운이 해운에 대해 가지던 전통적인 약점을 보완하기에 충분하기 때문에 해양국가가 대륙국가에 대해 전통적으로 누리던 우위가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더 많은 인적 물적 자원을 확보하고 있는 대륙이 해양세력에 대해 우위를 확보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라시아 대륙의 중심으로부터 거대한 제국이 등장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전통적으로 해양국가인 영국은 다른 해양세력과 연합하여 그러한 세력의 등장을 견제해야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습니다.

실제의 역사를 보면 후발 제국주의 국가들은 이미 선발 제국주의국가들이 선점하고 있는 해양을 통한 팽창보다는 육지와 철도를 통한 팽창에 더 주력했습니다. 제정 러시아는 시베리아 횡단 철도에 국운을 걸었고, 제정 독일은 베를린과 바그다드를 철도로 연결하는데 주력했습니다. 일본은 강력한 해군국이었지만 해군의 역할은 오히려 방어적인 것이며 실제 해외 팽창은 대륙을 향해 철도와 함께 전개되었습니다. '은하철도 999'를 보며 일본 사람들에게 철도가 싣고 달리는 것은 제국주의의 꿈이 아닐까하고 생각하는 것은 저뿐일까요?

이렇게 보면 20세기의 역사는 새롭게 대두하는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투쟁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양차대전을 통해 새로운 육상제국을 건설하려던 독일과 일본이 해양세력의 연합에 의해 패배 당했고, 냉전을 통해 또 다른 육상 제국인 러시아가 패배합니다.

대륙 세력의 패배의 원인은 아마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 철도를 비롯한 육상 운송의 혁명을 가져온 산업혁명은 동시에 해양 운송의 대형화 기계화도 가능하게 하였다. 둘째, 배가 다니는 바다는 주인이 없지만 철도가 놓이는 육지는 주인이 있다. 그러므로 대륙이 정치적으로 분열되고 대립되어 있으면 철도에 근거한 대륙제국의 등장은 가능하지 않다. 이런 분열을 극복하고 대륙을 정치적으로 통일하려는 시도는 각 세력간의 치열한 투쟁을 낳으며 결국 해양세력의 개입과 견제의 여지를 넓혀준다. 셋째,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의 투쟁이 20 세기의 치열한 이데올로기적 투쟁과 중첩되어 진행되었다.

그렇다면 대륙 세력의 예외 없는 패배에 비추어볼 때 대륙제국론은 폐기되어 마땅할 이론일까요? 꼭 그렇게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육상운송 혁명이라는 하나의 요인에 너무 큰 중점을 둔 것이 이 이론의 최대의 약점이기는 하지만 바로 이 약점이 이 이론을 구제해주는 역할도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대륙제국의 패배의 원인을 육상운송에 기초한 대륙제국 자체의 한계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문화적 요인등 그 외 다른데서 찾을 수 있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대륙제국 등장의 기술적 조건은 이미 존재하며 기타 정치적 문화적 조건이 갖추어지면 대륙제국은 등장할 수 있다는 수정된 명제는 아직도 타당할 것입니다.

이 이론이 현실을 얼마나 잘 설명할 수 있느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이 이론이 주요 열강의 정책 결정자들의 생각에 중요한 한 부분을 차지해 왔고 지금도 차지하고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해양국가의 지도자로서는 대륙제국의 등장은 언제라도 가능한 것이고 한 번 해결했다고 끝나는 일도 아닐 것입니다. 항상 경계하고 조심해야할 일일 것입니다.

남북한 철도의 연결은 시베리아 횡단철도와의 연결을 전제로 하고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해양국가들이 100년이 넘게 두려워하던 것이 현실로 한발 더 가깝게 접근한다는 것이지요. 유라시아를 통괄하는 운송체계의 건설은 지금까지의 해양세력 중심의 세계판도가 변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지요.

역사의 아이러니는 이런 변화가 유라시아 대륙에서 등장한 패권국가의 승리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반대로 모든 패권추구국가가 예외 없이 패배하고 실패하였기 때문에 가능해졌다는 것입니다. 결국 유라시아 대륙의 패권국가를 패배시키는데 전력을 기울였던 해양국가들은 결국은 대륙 세력의 등장을 용이하게 해주는 역할을 하고만 것이 아닌지도 모릅니다.

백년동안 논의되고 추구되고 두려하던 것이 이제는 구체적인 현실이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의 전개가 궁금해지는군요. 또 다시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의 충돌이 다가오는 것일까요? 아니면 대륙세력들이 각자의 패배와 한계를 인정하고 서로 공존하듯이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의 공존도 가능할까요?

by 인형사 | 2002/09/19 00:39 | 옛글 창고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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